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 하피즈 (문단 편집) ===== 연이은 반란과 진압, 그리고 죽음 ===== 알 하피즈가 70대에 접어듦과 함께 한때 안정되었던 이집트는 다시 반란의 온상이 되었다. 1145년 알 하피즈의 --아직 살아있는-- 숙부 중 한명인 아불 후세인이 사힙 알 밥 (비서실장) 쿠마르타쉬에게 자신의 칼리파 즉위를 돕는다면 와지르에 봉하겠다며 포섭하려 하였다. 다행히 쿠마르타쉬가 알 하피즈에게 고발하여 음모는 적발되었고, 후자는 아불 후세인을 감금하였다. 1146년에는 장군 바크티야르가 상이집트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서부 사막의 루와타 베르베르 군대에게 패하였다. 다시 1148년 5월에는 9년째 궁전에 유폐되어 있던 리드완이 약 18m 길이의 땅굴을 통해 탈출하였다. [[나일 강]]을 건너 [[기제]]로 향한 그는 베두인, 루와타 베르베르인 등을 규합하여 카이로를 향해 진격하였다. 이븐 툴룬 모스크에서 칼리파 군을 격파한 리드완은 패잔병을 추격하며 시내로 향하였고, 알 하피즈는 --늘 그래왔듯-- 궁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하였다. 노련한 칼리파는 리드완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이며 그의 요구대로 반군의 봉급으로 쓰일 돈까지 보내주었다. 동시에 알 하피즈는 근위대 중에서 흑인 병사 10명을 선발하여 리드완 암살을 맡겼다. 그들은 아크마르 모스크 주변에 있던 리드완을 향해 10년 전의 구호인 '알 하피즈, 야 만수르'를 외치며 돌격하였다. 난데없는 소동에 놀란 그가 말 위에 오르자 위치를 파악한 그들은 리드완과 그 동생을 공격해 살해하였다. 이로써 17년에 걸친 리드완과 알 하피즈의 악연이 종식되었다. 한편 1149년에도 니자르의 다른 아들이 루와타 뿐만 아니라 (파티마 조의 개국 세력인) 쿠파마 베르베르 인들까지 모아 알렉산드리아를 공격하였고, 반격을 위해 파견된 토벌군 마저 격퇴하였다. 이에 알 하피즈는 전과 비슷하게 루와타 족장들을 재물과 나일 델타의 영지를 대가로 매수하여 그를 죽이게 하였고, 곧 카이로로 수급이 도착하였다. 같은해, 이번에는 경쟁 군사 집단인 주유쉬야와 라이하니야 병사들이 카이로 거리 한복판에서 무력 충돌을 벌였다. 사람들이 시내로 들어가길 겁내는 상황이 이어진 끝에 패싸움은 주유쉬야의 승리로 귀결되었고, 라이하니야는 기제로 축출되었다. 5년째 이어진 반란 외에 재해 역시 큰 피해를 야기하였다. 1139년 나일 강의 범람이 기록적으로 낮았고, 그로부터 시작된 기근과 역병은 1142년 이집트 전역을 휩쓸었다. 그러던 1148년, 나일 강의 범람이 이번에는 너무 높아 강물이 카이로 성문까지 차오르기도 하였다. 각종 어려움 속에서도 국정을 게을리 하지 않던 알 하피즈는 1149년 10월 10일, 극심한 복통을 앓고 사망하였다. 계승 위기를 의식한 듯 알 하피즈는 아들을 다섯이나 두었지만, 그 중 둘이 살해당하는 등의 비극으로 다들 요절하여 사망 시에는 16살의 막내 아들 아부 만수르 이스마일만이 남았다. 그는 칼리파 [[앗 자히르]]로 즉위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